부모님은 소중하니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또 하나의 가족처럼
함께 고민 할게요
3년 연속 한국소비자만족지수 1위케어서비스(방문요양, 주간보호) 부문
한경비즈니스 · G밸리뉴스 공동주최
1522-6585
요양가이드
90세에 한글을 배운 어르신이 가장 먼저 한 일
90에 쓴 사랑
진정으로 함께 할 때 닫혔던 마음이 열립니다.
온 세상을 맑고 푸르게 피워내는
“희망”의 비가 내리는 5월.
하얀 머리 곱게 넘기시고 더듬더듬 걸어서
휠체어에 몸을 맡기어 봄나들이 하러 공원에 나갑니다.
펄럭이는 바람, 시원한 공기,
푸르른 나무 냄새를 온몸으로 느끼며
하늘로 시선을 옮겨봅니다.
“야야~~ 내년에도 볼 수 있을까?
얼마큼 더 볼 수 있을까?”
“야, 저기 꽃 좀 봐라 아이고 이뻐라,
어쩜 이리 이쁠까?
꽃이 다 피었네. 내 얼굴 주름도 다 펴져라”
“이기남 선생님, 정말 오래오래 보고 싶어!”
“어르신!
돌 틈새로 비집고 올라온 풀들을 보세요.
지금 행복의 꽃이 피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아주 오래오래 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59세의 요양보호사로
가족요양 4년, 방문요양 4년차 입니다.
친정 어머니가 치매로 13년을 앓으시는 동안
치매 초기부터 말기까지 곁에서 지켜보며
가족들이 많은 고생을 했고,
마지막 4년은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모시는 동안 늘 시행착오가 따랐고
어머니를 보낸 뒤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 걸 보면
아마 미안함 때문이겠지요.
그 당시에 치매교육을 들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고,
주변에 치매를 겪는 어르신을 보면
남다른 애정이 느껴져
어머니께 못 해드린 것을 생각하여
더 잘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현재 방문요양으로 모시고 있는 수급자는
90세 여자 어르신이며
저와 1년 4개월 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어르신은 기초수급자이시고
심장병, 파킨슨병, 갑상선, 관절염을
앓고 계십니다.
욕심이 많으시고 성격도 예민하고,
까다로우셔서 요양보호사와 불화가 많아
마지막으로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인사를 하자마자
“난 요양보호사 선생이라고 하기 싫어!
아줌마’라고 부를 거야”
그리곤 바로 청소부터 시키셨습니다.
“베란다 물청소, 방충망 청소하고 먼지 있으면
내가 기침하니까 물티슈로 창틀도 닦아.
걸레는 색깔 있는 거 말고 흰 거로 해.
그래야 깨끗하게 했는지 내가 알지”
이게 아닌데, 속으로 되뇌면서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사비로 청소 용구를 사서 청소했습니다.
어르신과 친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지요.
어르신이 거주하는 이곳은 특수 지역이라
어르신들이 요양보호사를 자주 바꾸시며
도우미라고 호칭을 합니다.
연세 드신 분이라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은 참고 있지만
때로 용기 있는 누군가가
“이건 아닙니다”라고 하면
“너희들이 우리 때문에 먹고살지” 라며
막말을 하시는 그런 곳이지요.
저도 ‘요양보호사는 파출부가 아닙니다’라는
마음을 꾹 숨기고 일만 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면서
운동을 시켜드리고
어르신을 모시고 카페도 갔습니다.
커피도 마시고 빵도 드시게 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냈어요.
어르신의 노후 생활 안정과
어르신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한
노인장기요양제도에 대해 설명드리고,
“그 서비스를 해 드리기 위해
요양보호사가 오는 겁니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도움 받으시고
신체 기능을 더 잃지 않게 함께 노력해요”
말씀드렸죠.
처음에는 반응이 시큰둥하더니
마지못해 “알았어!”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어르신을 위하여
장 보기, 보행운동, 병원 동행을 하다 보니
알뜰한 어르신의 생활력을 보게 되었습니다.
비닐 가방을 들고 다니시는 것이 안쓰러워
예쁜 가방을 선물해 드리고,
기침을 자주 하셔서 비싸진 않지만
예쁜 목도리를 사서
선물해드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요양 제공자와 대상자로의
관계가 점점 좋아지고 있던 중,
성인이 된 어르신의 외 손자가
어르신 집에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출근을 해보면 손자가 덩그러니 누워있기도 하고
물건을 어질러 놓기도 하고
사람 오는 것을 싫어하여
얼굴엔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어요.
제 아들 또래로 돼 보이는 손자도
첫 대면 때의 어르신처럼
“아줌마 아줌마!”하며 함부로 저를 대하더군요.
그래서
‘손자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어르신은 방문요양 수급자라
3시간의 서비스를 받고 계시고
내가 이 시간에 오는 게 불편하면
내가 오는 시간을 피해서
다른 볼일을 보면 어떻겠느냐,
손자 분은 성인이니
본인 것은 본인이 해야한다’ 라고 말을 했지요.
그러나 손자는 개인의 아픈 사연으로
상처를 품고 있어서
굉장히 예민하고 화를 자주 내었고
어르신과도 자주 부딪히고
당연히 저와 관계도 나빠져만 갔습니다.
우리가 하는 요양서비스는
수급자만 대하는 게 아니라
함께 있는 수급자의 가족들 또한
대상자라고 느끼고 이들도 상담해 주고
돌봐야 할 존재라 생각했습니다.
이젠 내 숙제가 배로 늘었구나 생각하며
변화를 시도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집에서 가져온 간식도 함께 먹고
손자가 관심 가질 만한 좋은 책도 빌려주고
용기를 주고 항상 웃어주었더니
조금씩 달라짐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손자가 여행을 다녀왔다면서
초콜릿을 직접 제가 주더라고요.
못되게 군거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까지 있어서
기다려준 보람을 느끼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던 어르신도
감추어 두었던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자식 이야기,
먹고살기 위해 일만 해서
몸이 상한 이야기를 하시며
제 손을 잡고 눈물을 지었지요.
‘이런 사연을 가지고 계셔서
마음을 여는데 어려움이 있었구나,
일종의 반항이었고
인의 처지 때문에 억지를 부리셨구나’
하는 공감이 느껴지며 저 또한 함께 눈물 지었지요.
하루는 출근을 하니
어지럽다고 누워 계시는 어르신께
어디 편찮으시냐 여쭈었더니
“저기 있는 약을 먹었더니 어지러워” 하셔서
약 봉지를 살펴보았더니 밤에 드시는 약을
아침에 드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서야 어르신이
한글을 전혀 모르는
문맹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부터
밤에 복용하실 약에는 달 모양 그림,
아침에 복용하실 약에는 해 모양 그림을
그려서 헷갈리지 않도록 해드렸습니다.
어르신은 환하게 웃으시며 좋아지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치매 검진을 받으러
다녀오신 뒤 얼굴이 창백해지시더니
“이것 좀 봐” 하시며 문진표를 내미셨습니다.
문진표에는 ‘인지 저하’라는
글자가 쓰여있었습니다.
“어르신 걱정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일 하고 싶은 거 말씀해 보세요!”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내 이름! 내 자식 이름!
죽기 전에 한번 써보고 싶어!” 하시더군요.
저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일 평생 자식을 향한 사랑을
당신 손으로 얼마나 쓰고 싶으셨을까?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저는 대답했습니다.
“네 어르신! 그렇게 해 드릴게요!
한글 배우면 순 운동, 뇌 운동이 되서
치매 예방에도 좋으니 지금부터 바로 시작해요”
그렇게 우리는 우리만의 희망과 사랑을
새로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나간 달력을 모아 함께 자르고 줄을 긋고
필기구를 사 왔습니다.
기본 음절표를 만들어 벽에 붙이고
집안에 있는 집기마다 이름을 써서 붙였습니다.
나무젓가락으로 모음을 만들어
받침 없는 글을 먼저 가르쳐 드리기 시작했고
연이어 아들, 딸, 손자, 본인 이름을 시도했습니다.
“이게 우리 아들 이름이여~?”
”이게 내 딸 이름이여~?”
”아유 이렇게 쓰는 거구나” 감격하시며
“아이고 좋아라~!” 하셨습니다.
90 평생 그토록 해보고 싶었으나
한번 도 못해 보셨던
배움의 열기를 불태우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정말 선생님이라 부를게” 라며
어르신은 많은 변화를
제게 보여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심술도 안 부리시고
마음도 밝아지시고 입가엔
늘 웃음이 피고 있었습니다.
출근시간쯤 되면
“우리 선생님 언제 와 빨리 와” 하셨고
저도 그런 어르신을 보며
덩달아 신나고 기대가 되었습니다.
정석대로 하시면 잘 안되어서
어르신 눈높이에 맞추어
맞춤형 한글을 가르쳐 드렸고
어르신의 예전 추억의 낱말,
현재 생활하는 일상의 낱말을
매번 고민해가며 알려드렸습니다.
“된장 담글 때 뭐가 필요하죠?”
“매주, 소금, 물” 하고 답하시면“
그러면 매주는 무엇으로 만들죠?” 하며
관심 있어 하시는 낱말부터 알려드리니
눈을 크게 뜨시며 척척 깨우쳐 나가셨지요.
얼마나 열심히 따라 하시는지
2개월 만에 TV에 나오는 받침이 없는
자막을 읽으시게 되었고,
아는 단어가 나오면
“저거 복지관이지?, 저거 사과지?”
나날이 배움에 기쁨에 들떠 계셨습니다.
숫자도 1~100까지 배우시고,
파킨슨으로 인해 떨리던 손도
연필 잡는 힘이 생겨 떨지 않게 되었습니다.
설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어르신께서 “자 이거 받아” 하시며
봉투를 하나 건네주셨습니다.
그 안에는 ‘이기남 사랑해’를
쓴 종이 편지와 함께
용돈 만 원이 담겨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날의 소름 돋는 벅찬 감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90에 쓴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빨리 한글을 깨우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어르신의 간절함이
평생의 소원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저는 당장 답장을 썼습니다.
‘어르신이 행복하면 저 또한 행복합니다.
어르신과 함께 해 온 추억을 잊지 않고,
지금처럼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고
하고 싶은 것 다 해보시며 살 수 있도록
옆에서 열심히 돕겠습니다’고 하며
주신 용돈에 대한 답례를 했습니다.
어르신은 당신의 가족들에게도
커다란 사랑을 선물하셨습니다.
자녀들은 90세의 엄마가 처음으로 써 주신
손글씨를 탁자에 꽂아
간직하고 있다고 고마워하셨습니다.
현재 어르신은 일기를 적으시고
책도 읽으십니다.
공부하는 재미에 6시면 일어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읽어보고, 써보고, 내어드린 숙제도 하시며
저녁에 잠 안 오면 책을 읽으십니다.
원래 병원도 자주 가셨는데
글을 배우고 난 뒤에는
지병으로 약 타러 가는 것 외에는
병원도 자주 안 가십니다.
“이기남 선생님,
나 공부 안 했으면 무슨 재미로 살지??
잠만 잤을 거야.. 지금은 사는 거 같아~”하십니다.
열심히 글을 배우시다 보니
인지력이 많이 호전되었고
희망을 보여주시는 어르신 덕분에
저도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얼마 전 어르신의 90세 생신이셨는데,
집안의 우환으로 인해
식구들이 모두 어르신의 생신을 잊어버렸습니다.
출근해 보니 불어 터진 떡국과 김칫국이 있어
식사를 차려드렸더니
한술 드시고는 한숨을 들이쉬며
“맛없어. 못 먹겠어” 하며 웅크리고 계셨습니다.
우울한 어르신에게
“제자님~” 하며 꼭 안아드리고
케이크를 사와 초 꽂고 축하 노래를 불러드리니
그제야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뒤늦게 가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저녁에 급하게 생신잔치를 해드렸다고 합니다.
요양보호사는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가족이 미처 챙기지 못하는 것까지 함께하는
우리는 어르신의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내가 먼저 진심으로 다가갈 때
어르신의 마음이 열립니다.
케어링에서는
늘 어르신 댁에 가서 일만 하지 말고,
어르신과 함께하는 일상을 교육으로 알려줍니다.
이것이 어르신을 방문하는
우리 요양보호사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어르신이 좋아하시는
노래 안동역을 적어드렸습니다.
가사를 읽으시게 한 후 노래를 가르쳐 드리고
심심할 때마다 꺼내서 부르실 수 있게
스마트폰에서 음악을 다운 받아
어르신 핸드폰 동영상에 저장해 드렸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퉁명스럽게
화를 내시던 어르신이 지금은
항상 싱글벙글 미소로 웃으시는
친절한 어르신으로 변했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인생을 바꾼다’
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다스리게 되고,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내 본분과 역할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하지 않았을 뿐,
못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90에 희망으로 사랑을 써 가는 어르신과
최선을 다하는 요양보호사에게
필요한 학용품과 동화책
그리고 칭찬과 격려를 보내주는
케어링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칭찬을 듣는 어르신과 저는
더 큰 희망을 써 내려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